[정희원 기자] 성인·청소년 사이에서 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과거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애니메이션·장난감 조립·게임 분야에서도 성인이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이같은 변화는 10여년 전부터 조금씩 확장돼 왔다. 최근에는 저출산 시대에 인구절벽으로 어린이용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들이 타겟을 어른 고객에게 돌리면서 ‘키덜트 문화’가 확장되고 있다. ‘경제력’과 ‘취향’이 합쳐진 결과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 캐릭터 산업은 현재 약 1조 6000억원으로 추정되며, 향후 약 11조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건프라 조립하고 레고 쌓고… 뇌기능 향상은 ‘덤’
장난감·게임 기업들은 아동뿐 아니라 ‘전연령이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모토로 기획·개발에 나서는 추세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성인에서의 프라모델 등 장난감 구입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피규어 수집·프라모델 조립이 취미인 40대 후반 직장인 A씨는 사무실에 자신이 조립한 건담 프라모델을 진열해 놓을 정도로 애정이 깊다. 그는 “프라모델 퀄리티는 높아지고, 조립은 쉬워진 데다가,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며 평소보다 조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고 했다.
‘글로벌 팬덤’이 뒷받침해주는 해외 유명 업계에서는 이같은 변화를 이미 받아들였다. 속칭 ‘건프라’, 건담 프라모델로 대표되는 일본 장난감 브랜드 ‘반다이’의 주요 타깃층은 키덜트족이다. 반다이는 일본 인구의 고령화, 글로벌 어린이 고객이 줄면서 시장이 위축되자 키덜트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장년층 이상을 타깃으로 한 ‘고령자용 장난감’도 다수 선보이고 있다. 손이 큰 성인 남성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크기를 조절하고, 노안이 시작되는 40대 이후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서 폰트 크기를 키웠다. 특히 설명서에는 뇌건강 등에 도움이 되고, 손자와 함께 놀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 시니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칼럼을 통해 “반다이는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 고령자와 장난감을 연결시킬 무언가로 예방의료에 주목했다”며 “장난감으로 신체∙정신력을 높이자는 설득이 통해 인구충격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프라모델 조립 등은 실제로 장년층의 뇌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조찬호 청담셀의원 원장은 “손을 움직이다보면 미세한 근육운동이 지속되고, 이는 뇌의 운동 피질을 지속적으로 자극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블록쌓기 장난감의 대명사 ‘레고’도 2000년대 초반 이후부터 꾸준히 어른 고객 모시기에 나서는 중이다. 레고는 2000년대 초반 선진국 저출산 추세·디지털 게임의 부상 등으로 부도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후 ‘본업에 충실할 것’을 선언하며 고객층을 성인으로까지 확장했다. 현재 성인 레고 마니아(AFOL)는 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연간 레고 판매량의 20%를 구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애들 보던 만화… 중장년층도 ‘푹 빠지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B씨(32)는 연초 어머니에게 자신이 넷플릭스를 통해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을 추천했다. 처음에는 ‘무슨 애들 보는 만화를 추천하느냐’던 어머니는 어느새 이를 ‘재탕’하며 결말 예측까지 나서고 있다.
B씨는 “분명 중고등학생 때만해도 만화를 ‘아이들이나 보는 것’, ‘나쁜 요소’로 치부하던 엄마였는데 어느새 같이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있어 새롭다”고 밝혔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박 작품’이 캐릭터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어 부가가치가 높다.
이뿐 아니다. ‘만화카페’를 찾는 성인도 많다. 편안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만화카페 프랜차이즈들도 번화가에 자리잡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인천의 한 만화카페 관리자는 “성인고객이 찾는 비중도 꽤 높다”며 “아무래도 과거와 달리 ‘성인의 취미는 이래야 한다’ 같은 고정관념이 사라지기 때문인 듯하다”고 했다.
◆색칠공부·다이어리 꾸미기… 새로운 ‘힐링취미’ 부상
아이들만 하던 ‘색칠놀이’도 어른들의 ‘힐링 취미’로 탈바꿈하고 있다. 독일의 연필 회사 스테들러는 “컬러링북을 칠하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홍보, 매출을 높였다. 이 회사의 2019년 매출은 3억8000만 유로(약 5100억 원)로 이는 10년 전 2억2600만 유로에 비해 46% 늘었다.
전문가들은 최근 컬러링북의 폭발적인 인기는 복잡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현대인의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실제로 테두리 속에 색을 칠하며 집중하다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뇌를 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팬시 제품의 인기도 상승세다. 과거 중·고교생이 이끌던 ‘다꾸’ 문화도 성인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다이어리 꾸미기’를 줄인 말이다. 자신의 하루를 정리하고, 예쁘게 기록하기 위해 손으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성인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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