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브랜드 만능주의’ 경종 울린 광주 참사

[세계비즈=박정환 기자] 한국인만큼 ‘줄 세우기’에 진심인 민족은 드물다. 기업이나 스포츠 등 어느 영역에서나 ‘빅(Big) 3’, ‘톱(Top) 10’ 등의 표현을 써가며 순위 매기기에 여념이 없다.

 

이는 건설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아파트 공화국인 한국에서 ‘큰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는 좋은 아파트’라는 인식이 유독 강하다. 이에 시공능력평가 기준 1위부터 10위까지의 소위 ‘10대 건설사’들은 막강한 브랜드 파워와 고급화 마케팅을 통해 서울 강남 등 핵심 입지의 정비사업을 독식했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HDC현대산업개발의 광주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는 이 같은 ‘브랜드 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잘 나가는 메이저 건설사의 브랜드가 아파트 품질과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잇단 재난급 산업재해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HDC현산은 지난해 기준 시공능력평가 9위의 ‘공룡’ 건설사다. 1970년대 중반 ‘압구정 현대아파트’ 신화를 쓰며 단숨에 1군 건설사로 발돋움했고 ‘아이파크’ 브랜드를 통해 건설 명가(名家)의 지위를 누려왔다.

 

최근엔 주택 사업 외에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참여하고 잠실 마이스(MICE) 복합개발사업을 수주하는 등 외연 확대에 나섰다. 하지만 정작 기본 중의 기본인 ‘안전’을 소홀히 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추락,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발생한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사고 당시 HDC현산은 조합 측과 50억원에 계약을 맺은 뒤 서울 소재 한솔기업에 하청을 줬다. 이후 한솔은 다원이앤씨와 공사비를 7대 3으로 나누는 이면계약을 맺은 뒤 광주지역 백솔건설에 다시 불법 재하청을 줬다. 50억원이었던 공사비는 마지막 단계에서 9억원으로 급감했다.

 

아직 명확한 조사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에서도 불법 하도급으로 인한 부실공사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번 사고로 모든 비난의 화살은 HDC현산에 향하고 있지만 다른 대형 건설사들도 안전불감증과 불법 하도급, 부실시공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실제로 이슈화되지 않았을 뿐 전국의 건설 현장에선 크고 작은 산업재해와 사망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작년 9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내 10대 건설사의 원·하청 업체에서 발생한 산재 건수는 2017년 812건에서 2020년 기준 1705건으로 약 2배 이상 급증했다.

 

또 국토교통부가 작년 11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공공공사 현장 136곳에 대한 특별실태점검을 벌인 결과 46곳(34%)에서 불법 하도급 사례가 적발됐다.

 

결과적으로 광주에서 발생한 두 건의 사망 사고는 언젠가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예견된 인재(人災)였다. ‘뿌리부터 바꾸지 않는 한 건설현장 사고는 러시안룰렛과 같다’는 업계 관계자의 푸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나마 건설사들이 오는 27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안전대책 마련에 전사적인 역량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건설업계는 이번 사고를 반면교사 삼아 불법 하도급·재하도급과 현장관리 소홀, 이로 인한 산재 발생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고급화 마케팅과 사업 확대에 앞서 ‘안전’이라는 기본부터 충실해야 K-건설의 재도약이 가능해진다.   

 

pjh121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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