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성의 金錢史]明 황제 하사금 가로챈 광해군

사르후 전투서 1만명 사망…만력제, 위로금 은 1만냥 하사
광해군, 하사금 가로채 개인용 사치품 구입에 전용

명나라의 황궁 자금성.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 병사들의 유족 위로금에 쓰라며 은 1만냥을 하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중간에서 가로채 개인용 사치품 구입에 전용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드라마나 소설에서 부하 직원들의 공로를 상사가 가로채는 에피소드가 종종 나온다. 이런 종류의 악덕 상사는 실제로 현실에서 꽤나 존재한다. 현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과거에도 흔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 중 하나가 조선 시대의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무려 자신의 병사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명나라 황제가 내린 하사금을 중간에서 가로챘다.

한 나라의 군주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졸렬하고 악질적인 사건이었다.

◆사르후 전투 참패…전사자 위로금으로 은 1만냥 하사한 만력제

당시 명나라는 만주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는 누르하치의 후금(훗날의 청나라)과 대립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국경 전투에서 패하자 명나라는 더 이상 동북방의 문제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 대군을 동원해 단숨에 누르하치를 토벌하기로 했다.

서기 1619년 명나라는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17만 대군을 일으켜 만주로 진군했다. 명나라를 사대하는 조선에도 파병 요청이 들어왔다. 광해군은 이에 따라 1만3000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절반도 채 안 되었기에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총병 두송이 공을 탐해 홀로 진격하다가 궤멸당하면서부터 전투 양상이 꼬이기 시작한다.

누르하치는 기병 특유의 빠른 기동성을 앞세워 각개격파 전술을 시행했다. 그의 군대는 비록 명군보다 전체 병력에서는 뒤졌으나 개개의 전장에서는 적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수를 유지했다.

명군은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한 채 차례로 각개격파당했다. 하필 결정적인 순간마다 모래폭풍까지 이는 바람에 힘도 못 써보고 태반이 전사했다.

전투는 완벽한 후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양호는 패주하는 군대를 제대로 수습조차 못한 채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고 칭한다.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패권이 교체되는 시발점이 된 기념비적인 전투다. 이 전투의 참패 후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

명군이 이렇든 처참하게 궤멸당하는데 조선군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다. 모래폭풍이 부는 가운데 느닷없이 돌격해온 후금군 기병대에게 무참하게 조선군은 무참하게 도륙당했다. 전사자만 약 1만명에 달했으며, 지휘관 강홍립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비록 완패했다고는 하나 1만3000명이나 되는 군사를 파병하고 이들 대부분이 전사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운 조선군의 의리와 충성에 명나라 조정은 감복했다.

이에 당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전사자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라며 조선 조정에 은 1만냥을 하사했다.

은이 귀한 조선에 은 1만냥은 매우 큰 돈이었다. 가뜩이나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재정 때문에 고심하던 조선 조정도 기뻐했다.

조선 후기 국정 전반을 총괄하던 비변사는 “황제 하사금으로 장사(將士) 이상에게는 전마(戰馬), 갑옷, 투구, 활, 화살 등을 하사하자”며 “또 군사들에게는 사람 수대로 나눠줘 겨울을 대비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은 가로채 개인 용품 구입한 광해군

비록 전사자의 유족에게 쓰는 비율이 너무 적긴 했지만 당장 군사 1만명이 전사하면서 국방력에 뚫린 구멍을 메꿔야 하는 상황에서 비변사의 진언은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비변사의 진언을 광해군은 물리쳤다. 그는 “수만의 사람들에게 은을 골고루 나눠줘 봤자 한 사람 앞에 얼마나 돌아가겠냐”며 “앞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할 일이 많을 테니 은을 사신 접대에 쓰자”고 주장했다.

조선 외교의 핵심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이니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은 1만냥은 엄연히 명나라 황제가 전사자 위로 및 부상자 치료에 쓰라고 하사한 돈이었다. 그 돈을 명나라 사신 접대에 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하지만 왕정에서는 왕의 말이 곧 법이다. 결국 정의에 맞는 비변사의 간언이 아니라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광해군의 말대로 일이 진행됐다. 은은 피 흘리며 싸운 병사들에게 돌아가지 않은 것은 물론 국방력 강화에도 쓰이지 않았으며 왕궁 깊숙한 곳에 봉인됐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광해군이 이 돈을 명나라 사신 접대에 쓴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광해군은 단지 신하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사신 접대라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이었다. 그는 그 돈을 착복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광해 14년(서기 1622년)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은 1만냥을 단단히 보관하고 용보(龍補), 겸금(兼金), 주옥(珠玉), 사라(紗羅), 능단(綾緞) 등을 사는데 쓰라”고 명한 구절이 나온다.

이 물품들은 보석과 비단의 일종으로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사치품들이다.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은을 착복해서 왕실 용품 구입에, 즉 자기가 쓰는 물건을 사는데 전용해버린 것이다.

실로 일국의 왕이라고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비열한 행위다. 1만 병사의 목숨값이 광해군에게는 자기에게 필요한 사치품을 구입할 비용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었다.

인조 반정 당시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과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사실 광해군의 진짜 악덕은 저런 착복과 과도한 궁궐 건축으로 백성들을 괴롭힌 것이었다. 광해군이 폐위됐을 때 슬퍼한 백성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목대비를 가두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행위야 분명 잘못이지만 재조지은, 즉 임진왜란 당시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했다는 인조 측의 주장은 어이없는 수준이다.

그들 입장에서야 청나라와도 되도록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광해군이 밉살스럽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정작 명나라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리어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을 ‘만고의 충신’이라고 상찬했다.

때문에 배신자 광해군을 쫓아냈다며 의기양양하게 북경(명나라 수도)을 조선 사신은 전혀 상상도 못한 불호령을 뒤집어쓰고는 혼비백산한다. 명나라의 대신들은 인조를 “찬탈자”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찬탈자를 몰아내고, 광해군을 복위시키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인조는 몇 년 동안 명나라 조정에 애원하고 나서야 간신히 왕으로 책봉받는다. 그러나 명사(明史)에는 여전히 인조가 찬탈자로 기록돼 있다.

이토록 빈약한 외교 감각으로 정치를 하니 청나라와의 관계라고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인조는 쓸데없이 청나라를 자극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유발시켰다.

병자호란에서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끝내 항복한다.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 조아리기를 한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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