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출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연간 1조 달러’ 고지 돌파를 앞두고 있다. 수출 1억 달러 달성을 기념해 1964년 11월30일을 ‘수출의 날(현 무역의 날)’로 제정한 지 62년 만에 수출 규모가 1만배 급증했다. 식민지 경험과 끔찍한 내전을 겪은 최빈국이 글로벌 산업 지형을 주도하는 수출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이다. 주력 수출품도 섬유, 가발, 광산물 등에서 반도체, 자동차 등으로 변모했다. 다만 특정 첨단 업종이 전체 수치를 견인하는 ‘외화내빈’의 구조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 작년 수출액 이미 넘었다…獨·中·美 이은 대기록 코앞
7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누적 수출금액은 8145억 달러로 집계됐다.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던 지난해 실적(7093억 달러)을 이미 넘어섰다.
수출 신기록은 반도체 초호황 흐름을 탄 IT 품목이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와 컴퓨터 수출은 각각 메모리 수요 증가세, AI 인프라 수요 증가로 가파르게 늘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중동 지역의 긴장 상황은 여전히 우리 수출에 큰 변수로 남아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지금의 추세라면 연간 수출 규모가 1조 달러 돌파가 유력하다. 전 세계에서 연 수출 1조 달러를 넘긴 국가는 독일, 중국, 미국 등 3개국뿐이다. 전통 제조업 강국인 일본,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도 넘지 못한 문턱을 한국이 돌파하는 셈이다.
◆ 쌀·돈모에서 AI 반도체로…수출 포트폴리오의 질적 대전환
수출 포트폴리오의 질적 전환은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1950년대 주력 수출품목은 쌀, 생사, 김, 한천, 돈모(豚毛), 면직물 등이었다. 부가가치를 키워 해외로 팔 제품이 없었던 터라 1차 생산품의 비중이 전체의 70~80%에 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추진된 1960년대엔 합판, 가발, 신발 등 1차 경공업 제품의 수출비중이 80%까지 뛰었고, 중화확공업을 적극 육성한 1970년대엔 전체 수출에서 기계, 선박, 철강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수준까지 올라왔다.
1980년대엔 전기·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류의 비중이 높아졌다. 현재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 자동차, 석유제품 등이 서서히 핵심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게 이 즈음부터다. 1990년대 들어선 반도체가 수출품목 1위를 차지했다. 1995년엔 반도체와 자동차가 수출을 이끌면 연간 수출 100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 반도체 비중 40% 넘어서…석화 등 후방산업은 찬바람
수출 1조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상황이지만 주요 업종 간 양극화는 점차 심해지는 양상이다. 후방 산업인 석유화학과 철강 등은 침체가 장기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공격적인 설비 증설에 따른 공급과잉에 직면한 석유화학 산업은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반도체 수출이 호조를 띠고 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전 세계적인 AI 전환 과정에서 한국이 핵심공급망 역할을 맡게 된 점은 고무적이지만, 특정 품목 쏠림 현상은 향후 업황 변동에 따른 구조적 취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실제로 한국무역협회의 무역통계시스템 ‘K-stat’에 따르면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반도체의 비중은 지난해 24.4%에서 올해 8월 누적 기준으로 40.4%까지 치솟았다.
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최근 ‘주요 무역대국의 사례와 비교해 본 한국 수출 동향과 과제’ 보고서에서 “각 국은 특정 품목·시장·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도록 다각적인 다변화 정책을 추진 중”이라고 진단했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