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암·후각 상실 딛고 “향수는 내 운명”… 조 말론의 재도약

서울 찾은 천재 조향사 조 말론 CBE
‘조말론’ 이어 ‘조 러브스’ 창립
“큰 성공 뒤 암·후각상실 역경
5년 뒤 영감 회복…새 향수 내
‘첫키스 경험’ 같은 존재 될 것“

조말론 CBE가 강연하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삶에서 잠깐 멈춰가는 순간이 온다면, 과거는 떠나보내고 미래를 위해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모험하며 꿈을 꾸고 창조해보세요. 에스티로더와 조말론 런던을 떠난 이후, 다시 성공할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결국 ‘조 러브스’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난 8일 저녁, 퇴근시간 무렵부터 서울 스타필드 코엑스몰 별마당도서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날 니치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을 설립한 조향사이자, 영국 지휘관 훈장(CBE) 수훈자인 조 말론 여사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다. 400여명의 시민이 발길을 멈추고 조 말론 여사의 인생과 향수에 대한 철학을 들었다.

조말론 CBE의 강연을 듣기 위해 현장을 찾은 참석자들. 사진=정희원 기자

말론이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신의 두 번째 브랜드인 ‘조 러브스’의 신제품인 ‘에보니 앤 카시스’를 출시하며 방한했다. 이날 말론은 강연을 통해 그의 인생과 사업 이야기를 풀어냈다. 특히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했다. 약 1시간의 강연이 이어진 뒤에는 자신의 브랜드 향수를 가지고 온 팬들의 향수병에 사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천재 조향사’ 조 말론 CBE는 처음부터 향수로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니다. 그는 영국 첼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스킨케어 비즈니스’로 뷰티 업계에 입문했다. 그는 “작은 숍의 피부관리사로 시작했지만, 향수 비즈니스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고객의 팔을 향기로운 바디로션으로 마사지하면서”라며 “좋은 향이 소위 ‘대박’을 쳤고, 이는 사업을 완전히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이후 말론은 런던에서 5년간 아주 작은 매장을 운영했다. 향수 사업에 나선 지 5년 뒤인 37살, 글로벌 뷰티 공룡 에스티 로더에 회사를 판매했다.

 

그는 “각 분야의 ‘세계 최고’들과 팀을 이뤄 일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다”며 “젊었고, 남편과 첫 아들 조쉬를 막 낳았다. 이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 인생에서는 늘 예기치 못한 일이 찾아온다. 40살에 치명적인 암 진단과 함께 9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조말론 CBE가 강연하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암은 말론의 인생을 크게 바꿨다. 암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로 뉴욕을 찾아 새로운 치료에 나서며 적극 싸웠다. 문제는 후각이 사라진 것.

 

말론은 당시 그 누구한테도 후각을 잃었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는 “향수를 만든 것도 결국은 후각인데, 이 감각을 잃은게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데, 세계적인 미용회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담당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말론은 과감히 에스티로더와 조말론 런던을 떠났다.

 

더 이상 회사에서 향수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를 떠난 이후 한 달 만에 후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사임과 함께 5년간 향수 산업에 몸담을 수 없다는 계약서 조항에 서명도 마친 상황이었다.

 

말론은 “5년이 정말 고통스러웠다”며 “이 시간 동안 향수를 만드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5년이 지난 뒤, 삶의 기쁨을 주는 요소를 제 자리에 돌리려는 도전에 나섰다. 이렇게 조 러브스는 5년간의 공백을 거쳐 2011년 태어났다.

 

다만, 5년 만에 향수를 만드는 만큼 쉽지 않았다. 말론은 “향을 만드는 작업은 마치 근육과 같다”며 “운동을 계속해서 근육을 유지해야 되는데, 오래 쉬었다가 갑자기 운동한다고 해서 이전의 근육이 바로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에 말론의 남편 개리는 아주 작은 섬으로의 휴가를 제안했다. 말론은 이곳에서 다시 영감을 회복하고, 조 러브스의 첫 향수 ‘포멜로’를 만들어낸다.

 

조 말론 CBE는 “이 향은 내가 걸었던 바닷가로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며 별마당도서관을 포멜로의 향으로 채웠다. 그는 “파란 바다와 하늘 뒤로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향에서 소금기를 품은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 레몬이 곁들여진 피지워터와 식당에서 나는 음식냄새도 난다. 그렇게 포멜로가 태어났다”고 소개했다. 단순히 성분이 아닌 향기 속 이야기를 끌어낸 것.

조말론 CBE가 포멜로 향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포멜로를 세상에 이끌어낸 것은 한통의 전화다. ‘말론이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지인들의 연락이 쏟아졌다. 말론은 당시 영국의 가장 큰 백화점에서 뷰티 디렉터로 일하던 친구로부터 ‘함께 무언가를 해보자’는 연락을 받는다.

 

그는 “추운 겨울, 친구가 입고 온 버버리 코트에 포멜로를 잔뜩 뿌렸다. ‘24시간 안에 누군가가 무슨 향이냐고 묻지 않는다면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2시간 만에 전화가 왔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거리에서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친구에게 ‘이게 무슨 향수인지, 어디서 샀는지’ 질문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첫 번째 포멜로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엇다.

 

조 말론 CBE는 특히 “조 러브스는 고객에게 ‘첫키스의 경험’같은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경영철학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매장에도 창의적인 요소를 모두 쏟아부었다. 시향지 대신 매장을 ‘타파스 바’처럼 꾸몄다. 시향지 대신 마티니, 버블배스 형태 등으로 향을 맡는 타파스바를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시향할 수 있다. 말론은 “공연을 보는 것 같도록 설계했다”며 “종이로 향을 맡는 것보다 강렬한 경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론 여사는 이날 한국 시장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조 러브스의 첫 글로벌 진출 국가는 한국(2021년 진출)이다. 2020년 두바이에 팝업 매장을 오픈했지만, 정식 진출은 한국이 최초다.

조말론 CBE가 강연을 들으러 온 고객들에게 향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정희원 기자

조말론 CBE는 “용감함과 창의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브랜드도 성장할 수 있다”며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바로 신세계인터내셔날이었다. 덕분에 조 러브스가 글로벌 브랜드로의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이후에 많은 세계 시장들이 한국을 따라오며 글로벌 사업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매장을 내고 성장할 수 있도록 믿어준 팀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밝혔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코로나19 사태가 한창 불거지던 2021년 조 러브스의 판권을 확보해 니치 향수 라인을 강화한 바 있다. 당시 아시아 첫 번째 매장을 열었다. 현재 3개의 단독 매장을 운영하고 10개의 편집숍에 브랜드를 입점시켰다. 신세계인터내셔날에 따르면 조 러브스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17% 증가했다.

 

조말론 CBE는 이번에도 창의성을 더한 새로운 향을 선보인다. 평소 자신이 만든 스타일과 완전히 다른 ‘에보니&카시스’ 오 드 뚜왈렛 신제품을 출시했다. 그는 “아주 맛있는 블랙베리, 카시스를 바탕으로 하되, 엔도르핀을 보내는 ‘파출리’를 더해 ‘꿈’을 표현한 향”이라고 소개했다.

 

정희원 기자 happy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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