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남권에서 발생한 역대 최대 산불로 추가경정예산(추경) 재시동이 걸리면서 정부가 추경 추진을 공식화했다. 미국의 관세 정책에 따른 대내외 리스크 악재와 내수 부진 등에 대응하기 위해 추경을 편성할 수 있도록 여야의 합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여야는 추경의 범위와 세부내역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긴급현안 관련 경제관계장관간담회에서 “시급한 현안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속하게 집행 가능한 사업만을 포함한 10조원 규모의 필수 추경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대 분야로는 ▲재난·재해 대응 ▲통상 및 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 ▲민생 지원 등을 제시했다.
최 부총리는 “산불로 약 4만8000ha(헥타르)에 이르는 산림 피해와 75명의 사상자 등 역대 최대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다”며 “피해지역민들의 조속한 일상 복귀를 위한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과 지원이 긴요하다”고 설명했다.
최 부총리는 “산불피해 극복, 민생의 절박함과 대외현안의 시급성을 감안하면 필수 추경이 빠른 속도로 추진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여야가 필수 추경의 취지에 동의해 준다면 정부도 조속히 관계부처 협의 등을 진행해 추경안을 편성·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4월 중으로 추경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여야의 초당적 협조를 거듭 요청했다.
올해 1% 중반대의 저성장이 예고된 상황에서 추가적인 재정을 빨리 투입해야 한다는 데는 여야가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추경의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예비비를 놓고도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예비비는 2조4000억원으로, 지난해 정부가 제출한 규모의 절반으로 깎인 상태에서 국민의힘은 산불피해로 수 조원이 소요될 복구 재원을 위해 예비비 추경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은 산불피해뿐 아니라 장마와 태풍 등 재난·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2조원가량의 예비비를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아직 편성돼 있는 예비비가 사용되지 않았고, 현재의 예비비로도 이번 산불피해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직접적인 산불 대책 예산만 증액하면서 부처별로 흩어진 9200억원의 재해·재난 대책비를 우선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비비 증액 추경은 결국 탄핵 정국와 직결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감액 예산안의 단독처리 등 민주당의 입법 독재가 이유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은 이번 산불 사태를 계기로 야당의 삭감 예산안 단독 처리의 부작용을 부각하면서 계엄에 이르게 된 야당 책임론을 내비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예비비 증액이 계엄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올해 용처에 제한이 없는 일반예비비 8000억원을 제외하고 재해·재난 등을 위한 목적예비비는 1조6000억원 규모다. 일종의 외상비에 해당하는 국고채무부담행위도 1조5000억원 한도의 예비카드로 있다.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산불을 전후로 일주일 새 추경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맞다”며 “다만 여야가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추경안의 묘수가 도출될지는 판단하기 이르다”고 말했다.
추경을 두고 여야가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가적 대형 재난 앞에서 여론을 의식해 추경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26일 낸 ‘재난 극복과 경기 침체 방어를 위한 추경이 시급하다’ 보고서에서 “세입 경정의 경우 지난해 정부 세입예산안 편성 시점 대비 현 경기 상황이 악화한 점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상황으로 판단되며, 규모는 약 8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주희 기자 jh224@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