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유통업계가 동시다발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경기 침체 그늘 속에서 치열한 가격 경쟁과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 유통사뿐 아니라 거대 유통기업도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지난해 이른바 티메프 사태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홈플러스와 발란 등 오프라인 대형 유통사와 이커머스∙명품 플랫폼까지 줄줄이 흔들리고 있다. 국내 유통 전반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티메프 사태는 지난해 이커머스 플랫폼 티몬과 위메프가 재정 악화로 1조3000억원의 판매대금 지급 불이행 사태에 직면해 4만8000여 개 판매업체에 피해를 입힌 사건을 일컫는다. 지난해 7월 두 플랫폼은 자금 유동성 악화로 정산 지연과 상품 배송 지연 문제를 겪은 끝에 폐업 수순에 들어갔다. 해당 사건을 통해 이커머스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말 국내 대형마트 중 하나인 홈플러스가 회생절차를 신청한 사실이 알려지자 업계는 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홈플러스는 전성기 시절 전국에 140여개 매장을 보유했다. 하지만 2015년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 인수된 이후 실적 부진이 지속되면서 수익성 높은 점포 중심의 매각 작업에 나서왔다. 그 결과 전국 매장 수는 2015년 141개에서 2025년 현재 126개로 줄어들었다. 위기설이 돌던 중 실제 법정관리 신청으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명품 플랫폼 발란에서도 최근 정산 지연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판매업체는 “일정 기간 발란으로부터 매출 정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발란도 회생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업계 안팎에서 돌았다.
발란 측은 “일시적 이슈”라며 회생 신청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으나, 지난달 31일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제2의 티메프 사태’ 재연 우려가 제기됐다. 발란의 미정산 대금은 수백억원대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최형록 발란 대표는 “올해 1분기 내 일부 투자 유치를 진행했지만 추가 자금 확보가 지연되어 단기적 유동성 경색에 빠졌다”며 입점사의 상거래 채권을 안정적으로 변제하고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해 회생 신청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의 공통 원인을 ‘모기업 리스크’에서 찾고 있다. 위메프와 티몬을 인수한 큐텐코리아는 두 회사를 통합 운영하지 않고 별도로 유지하면서도 경영 정상화에 필요한 투자와 구조개편 없이 기존 운영체제를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산 지연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큐텐 측은 “기술적 오류”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2024년 7월 말 두 플랫폼 모두 회생절차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큐텐 측이 이커머스를 단기 수익용 포트폴리오로 취급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홈플러스는 2015년 영국 테스코로부터 인수된 이후, 수년간 세일앤리스백 방식으로 자산 유동화를 추진해왔다. 이와 관련 ‘유통 본업보다 부동산 수익에 집중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지속됐다.
실제 회생 신청 이후에도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 외에 뚜렷한 사업 혁신 계획이 부재하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만 MBK 측은 인수 이후 단 한 차례도 배당을 받지 않았으며, 기업 정상화를 위한 자금투입과 구조개편을 꾸준히 시도해 왔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모기업의 책임 회피성 경영과 유통업 전반의 출혈 경쟁 구조가 맞물리면서 업계 자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증대되고 있다. 특히 유통 플랫폼 간 최저가 보장, 무료 반품, 빠른배송 등 과도한 마케팅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이익은커녕 거래처 정산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구조에 내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내 유통시장이 자본력과 규모를 갖춘 대형업체 위주로 빠르게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한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이커머스 시장은 더 이상 단순 서비스 경쟁이 아니라, 누가 더 오래 손해를 버틸 수 있느냐의 체력 싸움이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통업계 임원은 “정부 차원의 대응도 필요하다”며 “정산 지연으로 인한 판매자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법적 장치, 예치금 제도 확대, 소비자 보호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유통 플랫폼 관리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희원 기자 happy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