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미식] 시간을 쌓아 올린 한식... 이금희 메이필드호텔 조리장의 변치않는 '기준'

요리에는 셰프의 성격과 삶의 태도가 그대로 배어든다. 같은 재료를 쓰고, 같은 조리법을 따르는데도 음식의 맛은 늘 다르게 남는 이유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 살아온 시간,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왔는지가 한 접시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메이필드호텔 서울의 한식당 봉래헌·낙원을 이끄는 이금희 조리장의 한식은 화려함의 과시가 아닌 ‘시간의 축적’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에서 시작해 오랜 시간 주방을 거쳐 5성급 호텔 최초의 한식 여성 조리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삶이 녹아 있다. 

 

그의 음식은 기본을 중시하고 보여주기보다 먹는 이를 먼저 생각한다. 오랜 시간 지켜온 반가 한식은 자극을 덜어내고, 계절과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속이 편안하고, 먹고 나서도 기억에 남는 맛’. 이 조리장이 말하는 좋은 한식의 기준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흑백요리사2’에서 이 조리장이 선보인 ‘공주 밤죽’도 이런 모습을 닮았다. 절제된 구성 속에서도 한국적인 온기와 깊은 맛을 보여주며 진한 인상을 남겼다. 24년째 메이필드호텔의 한식을 책임지고 있는 이금희 조리장을 만났다.  

이금희 조리장은 화려함보다 시간의 축적과 기본의 힘으로, 먹는 이를 먼저 생각하는 반가 한식의 깊이를 한 접시에 담아낸다. 김용학 기자

◆어머니의 손맛에서 시작된 한식사랑... ‘부엌이 놀이터’

 

이 조리장의 한식은 정갈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위로가 되는 맛이다. 그가 한식을 따뜻하게 풀어낼 수 있는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충남 서산에서 3남1녀 중 외동딸로 자란 그는 중부지방의 자연과 함께 성장했다.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자라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나물을 뜯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재료를 몸으로 익혔다. 제철에 무엇을 먹고, 언제 저장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배웠다.

 

손맛이 좋았던 어머니는 동네 행사가 열리는 곳마다 음식을 부탁받았다. 아버지도 동네 잔치나 제사 때 과일과 다과를 맡는 과방(果房)을 봤다. 이 조리장은 이 곁에서 자랐다. 어른들이 건네는 과자를 받아먹으며 먹는 즐거움과 나누는 정을 함께 배웠다.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 조청으로 엿을 만들던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북적이고 맛있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틈에서 자라며 따뜻한 한식의 기억을 쌓았다.

 

어머니가 일하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가마솥에 밥을 짓고 기다렸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이 조리장은 “어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밥을 지었냐며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여름이면 하지감자를 쪄 친척들에게 내놓아 칭찬을 들었던 기억도 또렷하다”고 회상했다. 칭찬받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한식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이 조리장의 기억 속 어머니의 음식은 지금도 기준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맛은 다시 나지 않더라”고 말했다. 봉래헌을 찾는 손님 중에는 이 조리장의 음식이 ‘친정 엄마가 해준 음식 같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이 조리장은 그 한마디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느끼곤 했다.

 

메이필드호텔은 최근 이금희 조리장이 흑백요리사2에 백수저로 출연한 것을 기념해 오는 2월까지 공주 밤죽을 포함한 화연 코스를 선보이고 있다.  메이필드호텔

◆계절과 시간을 녹이다... ‘쌓여야’ 완성되는 맛

 

봉래헌 한식의 중심에는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전해 내려온 ‘반가 음식’이 있다. 색다른 요리라기보다 시간이 검증한 음식이다. 이 조리장은 반가 한식을 ‘계절을 온전히 겪어내야 완성되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정월에는 장을 담그고 봄에는 나물을 준비하며 가을에는 저장할 것을 손질하고 겨울에는 육포와 유자를 다듬는다. 1년 내내 계절의 흐름에 맞춰 맛있는 음식을 차릴 준비에 나서는 셈이다.

 

그는 한식이 결코 ‘빨리빨리’ 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발효와 숙성,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야 비로소 맛이 완성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흉내가 아닌 진짜 맛이 나온다.

 

무엇보다 그는 한식이 원래 맵고 짜고 단 음식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를 보며 걱정이 앞설 때도 있다. 이 조리장은 “우리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들은 대부분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며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음식이고 이런 맛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한식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진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이 조리장은 장도 직접 담근다. 충북 괴산 메주로 직접 담근 된장과 2009년산 숙성간장을 씨간장으로 쓴다. 그는 “간장, 고추장, 된장은 담근 뒤 최소 2년을 거쳐 쓴다. 3년이 지나면 맛은 깊어지지만 서울의 변화한 기후 탓에 관리가 어려워 2년이 지나면 냉장고로 옮긴다”며 “24년 전 입사 초기와 비교해 서울의 날씨는 크게 달라졌다. 손님들의 입맛 역시 저염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기본은 지키되 손님들의 의견을 반영해 장의 맛을 조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씨간장은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맛을 지닌다. 시간이 지날수록 짠맛은 줄고 단맛은 깊어지며 색감도 점차 진해진다”며 “이 씨간장은 떡갈비를 비롯해 요리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이금희 조리장이 장독대 속 장들을 확인하고 있다. 김용학 기자.

◆김치가 흔들리면 상차림이 흔들린다

 

이금희 조리장의 한식에서 ‘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는 김치를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한식의 맛을 잡아주는 기준’으로 본다. 이 조리장은 “김치가 흔들리면 상차림 전체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매년 김장철이면 600~700포기의 김치를 담근다. 김장 과정은 철저하다. 절임 염도는 10%를 넘기지 않고 날씨에 따라 절이는 시간도 달리한다. 보통 6~7시간, 날이 유독 추우면 8시간까지 지켜본다. 삼투압 작용이 제대로 이뤄져야만 김치의 기본 맛이 잡히기 때문이다.

 

이 조리장은 “김치를 망치면 1년 내내 맛없는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절이는 과정은 반드시 본인이 직접 참여하고 양념 속을 넣는 작업도 숙련된 사람에게만 맡긴다. 비법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을 지키는 일이라는 판단이다.

 

이금희 조리장의 김치는 중부식, 서울식 김치다. 양념을 과하게 쓰지 않고 젓갈도 최소화한다. 그는 “허연 듯 보이지만 먹어보면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고 소개했다.

 

고춧가루는 영양 고춧가루만 고집한다. 양념에 쓰는 육수는 물 대신 죽방멸치와 북어 등을 넣어 진하게 끓여낸다. 찹쌀가루 대신 일반 쌀을 사용해 엉기도록 점도를 낸다. 단맛은 대봉감을 사용해 잡는다. 이는 김치가 쉽게 물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이 조리장의 레시피다.

 

봉래헌에서는 배추김치뿐 아니라 물김치에 대한 반응도 유독 뜨겁다. 아삭하게 씹히는 무가 깔끔하게 이 조리장의 한식과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물김치 국물을 꼭 마셔봐야 한다. 부드러운 탄산감이 입을 개운하게 만들어준다.

 

물김치를 익히는 과정에도 노하우가 담겨 있다. 이 조리장은 “손님들로부터 탄산수 넣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말하며 웃은 후 비결에 대해서는 ‘물김치가 익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꼽았다. 담근 김치를 한 자리에 두고 충분히 숙성시켜야 탄산감이 살아난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물김치는 이곳의 인기 곁들임 요리다. 여러 번 리필해 달라는 손님도 쉽게 볼 수 있다. 술자리를 가진 뒤 물김치로 해장하러 오거나 일주일에 서너 번씩 찾아 이 조리장의 물김치를 먹는 단골도 있을 정도다.

 

겉절이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그는 겉절이를 ‘샐러드처럼 즐길 수 있는 김치’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구상도 가지고 있다. 봉래헌은 시기마다 맛있는 채소로 김치를 담가 계절감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파김치는 봄, 파의 머리가 굵어지기 전 담가낸다.

 

이 조리장이 김치에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김치는 한식의 축이고 그 집 음식의 성격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조리장에게 김치를 어떻게 먹어야 가장 맛있는지 물었다. 그는 “배추김치는 역시 쌀밥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했다. 입맛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 김치를 맛본 손님들이 마지막에 꼭 밥 한 숟갈과 함께 먹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이필드 김치의 맛을 집에서도 이어갈 수 있도록 HMR도 선보였다. 이 조리장의 레시피로 배추김치, 파김치, 오이소박이, 총각김치 등을 선보이고 있다. 편의성과 효율보다 중요한 기준은 하나였다. 봉래헌에서 먹는 맛과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는 것.

 

이 조리장은 “사 먹는 김치가 아니라 누군가가 담근 김치라는 인상을 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며 “물김치나 겉절이 역시 언젠가는 HMR로 풀어보고 싶다는 구상도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메이필드호텔 봉래헌 이금희 세프. 김용학 기자

◆흔들리지 않는 ‘정통 한식’의 기준

 

이금희 조리장은 빠르게 변하는 외식 트렌드 속에서도 정통 한식의 유효성을 믿고 있다. 그의 한식 공부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선배 조리인들과 고서를 중심으로 스터디를 이어가고 궁중·반가 음식의 뿌리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뿌리에서 파생되는 변주를 택해 새로운 실험에도 나섰다.

 

방송 출연 이후 이 조리장의 일상은 한층 바빠졌다. 다시 출연 제의가 온다면 응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제는 후배들 차례”라며 웃었다.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는 “동료들이 ‘조리장님이 흑백요리사에 나와서 너무 좋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너무 감사하고 책임감을 느낀다”며 “다음 기회가 온다면 이번에는 후배들이 흑수저로 도전하길 바란다. 후배들에게도 늘 ‘한번 나가보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그는 “흑백요리사는 요리사로서 한 단계 성장하게 만드는 좋은 프로그램”이라며 “나 역시 경연을 거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많이 공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정희원 기자 happy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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