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보면서 수년 전 구직 시기가 떠올랐다.
작품에서는 수십년 제지업 경력을 쌓았음에도 업계 불황으로 해고를 당했고 그 뒤 재취업에 실패 중인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은 다른 직종을 찾아보라는 권유와 압박에 “30년 종이밥을 먹었다”며 구겨지고 찢겨진, 그럼에도 빳빳한 자부심을 절망적으로 앞세운다.
영화 속 등장인물 만큼은 아니지만 신문과 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13년째 종이밥을 먹고 있다. 그러면서 다니던 직장이 망하거나 비슷한 사정으로 재취업에 나선 경험도 있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어쩔 수가 없는’ 심정을 절감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원작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작가의 소설 ‘액스(The Ax)’는 1990년대 미국이라는 시기와 배경을 빼면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주인공은 ‘컴퓨터는 두뇌 노동자, 관리자, 그리고 감독들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오래 전 조립 라인의 로봇들이 육체노동자들의 밥그릇을 앗아 갔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 같은 중간 관리직이 가장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한탄한다.
해당 시기의 컴퓨터처럼 오늘날 인간의 밥그릇을 뺏기 위해 급부상 중인 것이 인공지능(AI)이다. 주요 정보통신기술(ICT) 선진국들의 최대 화두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한국도 정부가 나서 ‘AI 3대 강국’이란 목표를 선언한 상태다. ICT 업계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산업계가 AI 도입을 외치고 또 준비하고 있다.
AI는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되고 있다. 주변 사람들 중에도 오픈AI의 챗GPT 같은 생성형 AI 서비스를 업무에 활용하고 취미 생활에 쓰는 이가 많다. 국민 메신저라는 카카오톡도 챗GPT를 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AI의 답변을 정답지처럼 여기는 지인도 꽤 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생성형 AI는 확실히 시간 절약이란 의미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악물고 그러한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생성형 AI의 대명사격인 챗GPT의 경우 국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거부감이 컸다. 국문학과 출신이자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본능적으로 ‘밥그릇 뺏어갈 놈’이라 여겨졌다. 유용하다는 주변인들의 추천에 ‘거기에 빠져서 지배당하다간 곧 스스로 글 쓰는 법 다 까먹을 걸’이라며 괜스레 날선 반응을 보였다.
인터뷰나 기자회견 등 음성 녹음 파일을 텍스트로 자동전환하는 AI 서비스도 이용한 적 없다. 그 역시 거기에 의존하다보면 기자로서 듣고 풀고 해석하는 능력이 점차 퇴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어서다.
업무가 아닌 취미의 영역에선 한때 열풍이었던 ‘지브리풍 프사’의 유혹을 이겨냈다. 가끔씩 손 그림을 그리는 터라, 단순히 따라 그리는 것에도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연도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가의 화풍이 5분 내외 짧은 시간에 복제되는 것에 대신 열을 내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능력으로는 그릴 수 없는 지브리풍 이미지를 향한 욕심이 수차례 찾아왔지만 끝내 지조(?)를 지켜냈다.
2023년 만나이 통일법 시행 전까지 존재한 세는 나이를 기준으로 2026년 마흔 살이 됐다. 누구든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 이유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에는 글로서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태어났다고 믿어 왔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 특히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를 써내려가는 종이매체 기자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옳다 믿는 방식으로 내 밥그릇을 지켜내고 싶다.
앞으로도 AI는 계속해서 정교해지며 사양산업의 목을 죄어오고 또 유혹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