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별세한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던 투사이자 대한민국 민주 진영의 산증인이다. 고인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정부와 당 주요 보직을 맡으며 반세기동안 민주 진영을 지켰다.
고인은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이던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 들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도 고인의 민주화 의지는 꺾지 못했다. 육군교도소 수감 중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지도자들과 만나며 민주화 열망을 더욱 키웠고,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뒤 재야 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낸 고인은 이후 정치 여정 2막을 시작했다. 고인은 1987년까지는 민주화의 꿈을 향해 달렸고, 이후에는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 목표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후 평화민주당에 입당했고, 이듬해 제13대 총선에서 초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서울 관악을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19~20대 국회에서는 세종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내며 7선 고지를 밟았다. 18대 총선 불출마를 제외하면, 총선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선거의 제왕’이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계엄군의 광주시민에 대한 살상 행위를 낱낱이 밝혀내면서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노동 분야 입법 활동에도 주력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도 불렸다.
정부 요직도 역임했다.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에서 정무부시장을 맡았고,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초선 시절 함께 활약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었고, 2004년 고건 전 총리에 이어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총리로 임명됐다. 총리 시절 대정부질문 때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과 거침없는 설전을 벌여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당 대표도 지냈다. 2012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당 대표 지휘봉을 잡았다. 다만 18대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에게 당 대표 대행을 맡긴 뒤 물러났다.
이후 문재인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며 문재인 정권 창출의 공을 세웠다. 2018년에는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도 지냈다.
이재명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친노·친문계 좌장격이던 이 전 총리는 굵직한 선거 때마다 이 대통령을 지원하며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 2021년 5월 출범한 이 대통령 지지모임 ‘민주평화광장’ 역시 이 전 총리의 대표적 지지 모임인 ‘광장’이 모태가 됐다. 이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이던 2024년 4월 총선에서는 상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지난해부터는 이 대통령이 장관급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하면서 통일 정책 자문 활동을 맡는 등 말년까지 정치에 인연을 놓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이화연 기자 h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