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사람들이 만류하는데도, 엄흥도는 말하기를 ‘의(義)로운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요즘 흥행몰이 중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엔딩 장면의 글이다. 영화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단종의 이야기를 그렸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뺏기고 죽임 당한 조선 비운의 왕 단종과 목숨을 걸고 그의 마지막을 수습한 엄흥도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왜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들의 대화에는 꾸미지 않은 듯한 수수함, 질박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에게 슬픔과 비극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대형 참사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을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이 단종이란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엄흥도는 민초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권모술수’는 눈앞의 이익을 얻을 수는 있되, 역사적 관점에서는 ‘패배의 길’이라는 것을. 권력과 윤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엄흥도의 이야기는, 오늘날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도 평가 받는다.
지금 우리 경제는, 고유가·고환율·고물가라는 ‘3중고’에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표류 중인 한국 경제의 방향키를 잡을 노련한 선장이 절실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2일 차기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로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통화정책국장을 지명했다. 차기 총재는 인사청문회를 거쳐 이재명 정부와 함께 임기 4년을 보낸다.
신 후보자는 거시경제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오랜 기간 국제금융기구에서 일한 경제통이다. 신 후보자는 영국 옥스퍼드대·런던정경대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금융자문위원, 국제통화기금(IMF) 상주학자 등을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통령국제경제보좌관을 지내 전문성, 국제금융 인맥, 행정 경험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중앙은행의 정책 기조와 소통 방식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앙은행은 물가와 금융 안정이 본연의 업무인 만큼, 신 후보자의 어깨가 무겁다. 무엇보다 중동 사태로 인한 고유가, 고환율, 고물가를 관리하는 중책을 수행해야 한다.
게다가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은 남다르다. 지난 23일 원·달러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1510원을 넘어섰고, 코스피는 6% 넘게 떨어져 5400선을 간신히 지켰다.
중동 사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은 현실화될 수 밖에 없다. 신 후보자도 “최근 중동 정세가 급변하면서 금융·외환시장의 변동성과 경제 전망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신 후보자의 위기관리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국민 여망에 부응하려면, 소신있게 면밀히 실행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자칫 물가와 성장의 딜레마에 갇혀 통화 정책의 타이밍을 놓쳐서도 안된다.
선택과 결정은 저마다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역사적 평가는 냉혹하고 영원하다는 것이다.
엄흥도 의(義)가 재평가된 것 처럼.
김민지 경제부장
김민지 기자 minj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