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새 또 올랐냐고 묻는 손님이 많습니다. 예전엔 가득 넣던 분들도 요즘은 절반만 채우고 갑니다.”
1일 서울의 한 주유소 사장의 푸념이다. 이날 오전 9시 오피넷 집계 기준 서울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952.3원, 경유는 1927.9원이었다. 전국 평균도 각각 1903.5원, 1894.8원까지 올랐다. 이날 전쟁을 끝낼 준비가 돼 있다는 이란 대통령의 발언에 국제 유가는 하락세로 전환했지만 국내 유가는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주유소 전광판 숫자가 몇십원 오르는 수준이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도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흔들릴 수 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폐허 속 생존 본능을 그렸다면 이번 위기는 가격표와 장바구니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형태가 될 수 있다. 유가 급등이 물류비와 식품 가격, 배달비, 항공권 가격으로 번지면 시민들이 체감하는 위기는 전장이 아니라 생활비가 된다. 재난영화처럼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평온해 보이던 도시의 질서는 비용 충격 앞에서 국내 산업계는 생각보다 빨리 균열을 드러낼 수 있다.
시장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종전 기대가 없지 않지만 산업계는 안도보다 장기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핵심 변수는 호르무즈 해협이다. 이 해협은 세계 원유와 LNG 물동량의 핵심 통로다. 통항 차질이 길어지면 지금의 유가 상승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최근 국제유가는 배럴당 118달러선까지 올라섰다. 한국처럼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 의존하는 경제에는 유가 상승이 곧바로 수입물가와 제조원가 상승으로 연결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첫째, 종전 후에도 호르무즈 해협 차질이 장기화하는 경우다. 이 경우 유류세 인하와 가격 안정 조치만으로는 국내 기름값 상승을 막기 어렵다. 둘째, 해협 봉쇄로 인한 유가 상승이 항공유와 나프타, 해상운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경우다. 항공, 정유, 석유화학, 해운업 전반이 일제히 비용 압박을 받게 된다. 셋째, 에너지 쇼크가 산업용 가스와 화학소재 수급 불안으로 번지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단순한 유가 쇼크를 넘어 공급망 쇼크로 확산할 수 있다.
항공업계는 가장 먼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유가 상승은 항공유 가격과 유류할증료 인상으로 직결된다. 장거리 노선 운임 부담이 커지면 여객 수요와 화물 채산성이 동시에 압박을 받는다. 석유화학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제품 마진은 줄고, 수요 부진까지 겹치면 실적 방어가 쉽지 않다. 물류비 상승까지 더해지면 제조업 전반의 원가 구조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반도체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다. 당장은 확보 물량과 재고로 버틸 수 있더라도, 충돌이 길어지면 산업용 가스와 일부 화학소재 가격 상승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에너지 비용이 오르면 반도체 공정의 고정비도 뛴다. 한국 수출을 떠받치는 핵심 업종이 원가와 공급망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되면 이번 사태는 단순한 중동 리스크를 넘어 산업 전반의 실적 변수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유가 안정 대책과 지원책을 서두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이는 충격을 늦추는 조치일 뿐이다. 업계에 따르면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봉합되면 파장은 제한적일 수 있다. 반대로 공습과 봉쇄 우려가 길어지면 서울 주유소 전광판에서 시작된 숫자 변화는 항공권 가격, 화학제품 단가, 물류비, 소비자물가를 거쳐 산업계 전반의 투자와 실적을 흔드는 파도로 커질 수 있다. 서울의 주유소 가격표가 먼저 오른 것은 생활물가 신호를 넘어 산업계 비상등이 켜졌다는 경고에 가깝다.
김재원 기자 jki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