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정용진…내부 관리 허점에 27년 신뢰 무너져

정용진 회장 26일 직접 대국민 사과문 발표
“모든 책임은 저에게…현장 직원 비난 말라”
그룹 내부조사 결과 담당 직원 고의성 입증 안돼
마케팅 보고 라인 4단계 중 누구도 이의제기 없어
경찰 조사 적극 협조…고의성 발견 시 엄중 조치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6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김두홍 기자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6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김두홍 기자

1999년 한국 1호점을 내고 27년간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하던 스타벅스 코리아가 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계열사 스타벅스 코리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논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세계그룹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부실한 내부 마케팅 프로세스에 있다고 보고 전면 개선하겠다고 전했다. 다만 회사 차원에서는 해당 마케팅을 담당한 직원들의 사전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한만큼, 향후 경찰 조사에서 고의성이 드러날 경우 해고는 물론 민형사상 책임까지 물을 방침이다.

 

정 회장은 26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에서 스타벅스 코리아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실시한 탱크데이 마케팅에 대해 대국민 사과했다.

 

이날 어두운 표정으로 등장한 정 회장은 단상에 올라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대국민 사과문 낭독을 시작했다. 그는 “이번 일로 깊은 상처와 실망을 느끼신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여러분, 박종철 열사 유가족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들께 신세계그룹 회장으로서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저를 포함한 신세계그룹 구성원 모두 우리 사회의 역사와 희생을 기억하고, 늘 국민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국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근무하는 현장 직원들에 대한 비난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 회장은 “저를 포함한 신세계그룹 구성원 모두 이번 일을 통해 더 낮은 자세로 배우고, 더 노력하겠다”며 “내부 시스템과 리스크 관리 체계를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준도 더욱 높이겠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오늘의 사과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삼겠다”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국민 여러분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규봉 경영지원총괄 전무, 전상진 경영총괄 부사장, 김수완 대외협력본부장 부사장, 양종환 감사팀장 상무(왼쪽부터)가 그룹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사과하고 있다. 뉴시스
이규봉 경영지원총괄 전무, 전상진 경영총괄 부사장, 김수완 대외협력본부장 부사장, 양종환 감사팀장 상무(왼쪽부터)가 그룹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사과하고 있다. 뉴시스

이어 신세계그룹 임직원들이 단상에 올라 그룹 차원에서 진행한 사건 발생 직후인 19일부터 일주일간 진행한 내부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의 핵심은 회사 경영진이나 직원이 사전에 특정 의도를 갖고 기획했는지 여부다. 조사 대상은 임원진 5명과 마케팅 실무진 5명, 결재 합의 라인 5명 등 총 15명이다.

 

전상진 신세계그룹 경영총괄 부사장은 “고의로 해당 마케팅을 기획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면서도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이번 마케팅에 관여된 직원 5명 전원 직무배제, 관련자 전원 대기발령, 대표∙담당 임원 해임을 조치했다”고 설명했다.

 

신세계그룹에 따르면 문제의 마케팅은 스타벅스 코리아 커머스팀에서 제안한 것으로, 팀장→담당→본부장→대표이사 등 4단계 보고라인을 거쳐 최종 확정됐다. 이에 행사를 주관한 스타벅스 코리아 해당 커머스팀 전원과 전략기획본부, 대표이사 등 결재라인에 대한 휴대폰∙노트북 포렌식 검증과 교차 심문을 진행했다. 담당자가 해당 업무를 진행하는 데 사용한 장치와 하드 드라이브도 검증된 절차에 따라 모두 회수해 조사했다.

 

전 부사장은 “논란이 불거진 직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직원들의 부적절한 언행도 일부 확인됐다”면서도 “이러한 정황만으로 현재까지 해당 인원들의 사전모의 등 고의성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고 전했다. 해당 직원들은 “다른 텀블러 홍보 문구였던 ‘가방에 쏙’과 라임을 맞추는데 급급했다”, “인공지능(AI)에 물어봤다”며 고의성 여부를 부인했다.

 

또한 탱크데이 네이밍을 제안했던 직원 등 커머스팀 5명 중 3명이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휴대폰 제출을 거부해 업무 외 사적 대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사내 메신저 대화 기록이 회사 서버에 일주일만 저장되기 때문에 최초 마케팅 기획 단계에서 나눈 대화 내용도 사라진 상태다.

 

이에 신세계그룹은 본건에 대한 고의성 입증보다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향후 경찰 조사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려는 고의성 여부가 입증될 경우 해당 임직원을 즉시 해고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방침이다.

 

전상진 신세계그룹 경영총괄 부사장이 스타벅스 코리아 마케팅 경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화연 기자
전상진 신세계그룹 경영총괄 부사장이 스타벅스 코리아 마케팅 경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화연 기자

이번 사안은 마케팅 절차와 리스크 관리 시스템의 허술함을 드러낸 것이어서 더욱 뼈아프다.

 

전 부사장은 “4단계의 보고 절차에서 그 누구도 ‘5월 18일에 탱크데이는 안 된다’고 지적하지 않았고, 마케팅 기획과 승인 과정에서 단 한차례의 문제 제기조차 없었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번 마케팅 행사 합의자 7명 중 일부는 해당 마케팅 디자인 시안이 담긴 메일의 첨부파일조차 열지 않고 관행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마케팅의 즉시성을 우선시한 까닭에 과거에 진행되던 법무팀의 검증 프로세스도 진행되지 않았다.

 

전 부사장은 “이번 사안으로 스타벅스코리아 내부의 사회적∙역사적 민감성 부재와 마케팅 검증∙리스크 관리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했다”며 “이에 고의성 여부를 불문하고 해당 마케팅 관련자와 결재라인 전체에 대한 엄중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신세계그룹은 탱크 텀블러의 명칭이 계엄군의 탱크를 상징하며, 용량이 503㎖인 것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를 암시한다는 점은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했다. 탱크 텀블러는 해외 제조사가 제작한 것이며 해당 제품은 2023년부터 한국뿐 아니라 호주, 태국 등에서도 판매 중이다. 용량은 17온즈(oz)를 환산한 것으로 일본, 슬로바키아 등도 해당 표기를 사용한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전 부사장은 충전권 환불 개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고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공정거래위원회 표준 약관상 일정 부분 이상 사용해야 환불할 수 있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관련 부처와 협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주를 직접 찾아 5·18 단체 또는 시민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는지에 대해선 “진상 규명이 우선이지만 적정 시점에 광주 방문 등 공개적으로 의사 표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언급했다.

 

재발 방지 차원에서는 직원들의 역사 의식을 개선하는 노력을 이어갈 방침이다. 김수완 신세계그룹 대외협력본부장 부사장은 “이번 마케팅을 진행한 직원들의 연령을 보면 20대 초반 2명, 30대 후반 3명으로 이들의 역사인식이 회사와 사회가 느끼는 인식과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전 연령대 직원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정 회장이 SNS 소개글에 ‘멸공’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등 과거 행동으로 이번 사태가 부각된 것이라는 지적에는 “정 회장의 과거 발언은 이번 스타벅스의 부적절한 프로모션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화연 기자 hylee@segye.com

[ⓒ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 & segye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