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고거래 사기 조직으로부터 텔레그램을 통해 ‘통장을 빌려주면 매달 8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체크카드와 뱅킹 앱이 설치된 휴대전화를 넘긴 30대 남성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및 사기방조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여기에 더해 피해자 중 한 명에게 75만 원을 지급하라는 배상명령까지 함께 내렸다.
전자금융거래법은 통장·카드·비밀번호 등 접근매체를 양도·양수하는 행위뿐 아니라 대가를 받고 대여하거나 보관·전달·유통하는 행위 등을 폭넓게 금지하고 있다. 법 개정을 통해 대여를 알선하거나 중개·권유하는 행위까지 처벌 대상이 확대되는 등 관련 규제도 강화돼 왔다. 따라서 ‘통장만 빌려줬다’, ‘명의만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계좌가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을 알고 있었는지, 대가를 받았는지, 실제 범행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등이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될 수 있다.
청년층이 이러한 범죄에 노출되는 구조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고수익 아르바이트나 단기 부업을 미끼로 온라인 구인 경로 등을 통해 접근한 뒤 보이스피싱이나 대포통장 모집으로 연결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대출을 받기 위한 절차’나 ‘급여 수령용 계좌’라는 설명을 듣고 접근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계좌가 전기통신금융사기 등의 범죄에 이용되면 명의인 역시 형사책임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특히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형사처벌과 민사책임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민사상 책임이 자동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형사절차가 끝났다고 해서 피해자가 명의인을 상대로 제기할 수 있는 민사상 청구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계좌가 사기에 이용된 경위와 명의인의 인식, 대가 수수 여부, 실제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지 등을 토대로 부당이득반환이나 공동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이 별도로 문제될 수 있다.
대법원 역시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계좌의 명의인에 대한 민사책임을 판단하면서, 명의인이 범행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계좌를 제공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얻었는지 등 구체적인 사정을 살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즉, 계좌가 범죄에 이용됐다는 사실만으로 명의인의 민사책임이 당연히 인정되는 것은 아니며,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책임의 성립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몰랐다’는 항변 역시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에 따라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수사 과정에서 범행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통장을 제공하게 된 과정과 상대방과 주고받은 대화, 계좌를 제공한 목적, 대가를 받았는지 여부 등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장을 빌려주는 대가로 일정 금액을 지급받았다면 명의인이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반대로 별도의 대가를 받지 않았고 범죄 이용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계좌가 이용된 경우라면 민사책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정이 고려될 수 있다. 결국 대가 수수 여부만으로 책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좌 제공 과정 전반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접근매체를 건넨 행위가 어떤 법적 의미를 갖는지도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법원 판례는 접근매체를 건넨 행위가 언제나 동일하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며 소유권이나 처분권을 확정적으로 이전한 것인지, 일시적인 사용만을 예정한 것인지 등 구체적인 사정을 살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수사 초기 진술은 상당히 중요하다. 통장을 제공하게 된 경위와 상대방과의 대화 내용, 모집 공고, 송금내역, 체크카드와 비밀번호 등을 전달한 방식 등을 객관적인 자료와 함께 정리해야 한다. 이후 압수수색이나 휴대전화 포렌식, 계좌추적, 공범 진술 등이 이어지는 사건이라면 초기 진술과 실제 증거 사이의 불일치가 불리한 사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 명의 계좌니까 나도 피해자일 뿐’이라는 주장 역시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계좌가 실제 보이스피싱 피해금 등의 이동 통로로 사용됐더라도, 명의인이 범죄 이용 가능성을 인식했는지 또는 이를 용인했다고 볼 수 있는지, 계좌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대가를 받았는지 등이 함께 검토된다.
민사책임이 실제로 인정된 이후에도 주의할 부분이 있다. 판결 등 집행권원이 확정되면 현재 재산이 없더라도 채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향후 재산이 형성될 경우 강제집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재산 상태만으로 민사상 책임이 끝났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보이스피싱과 신종 스캠에 대한 금융권과 수사기관의 대응도 강화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경찰청, 금융감독원, 은행권 등은 대포계좌와 신종 사기 수법에 대한 탐지와 정보공유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어, 자신의 계좌가 범죄에 이용되는 상황에 대한 주의가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법률사무소 새율 강민기 대표변호사는 “경제범죄수사팀에서 근무하면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사건을 다뤄온 경험에 비춰보면, 수사기관은 단순히 계좌가 범죄에 이용됐다는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여 경위와 범죄 이용에 대한 인식, 대가 수수 여부 등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포통장 사건은 형사절차에서 어떤 혐의가 인정되는지를 판단하는 것과 별개로, 이후 피해자가 명의인을 상대로 민사상 책임을 묻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며 “텔레그램 대화내역이나 계좌 거래내역 등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수사 초기부터 형사책임뿐 아니라 향후 제기될 수 있는 민사책임까지 고려해 대응 방향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움말=법률사무소 새율 강민기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