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광장] 피임약과 경단녀

세계비즈 오현승 기자

 

경구피임약은 1960년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았다. 이듬해부터는 처방약으로 판매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피임약을 사용할 순 없었다. 많은 주(州)에서 미성년 여성이 부모 동의 없이 피임약을 구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당시 성년의 기준은 21세였다. 1972년 미국 투표자의 연령을 종전 21세에서 18세로 낮춘 수정헌법 26조가 채택되고서야 피임약의 보급에 속도가 붙었다.

 

피임약 보급 전인 1950~1972년까지 대졸 여성의 결혼 연령 중앙값은 몇 세였을까. 놀랍게도 23세에 불과했다. 지금이라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고 각종 인턴 경력과 해외경험을 쌓아야 할 나이인데, 이즈음 남편감을 찾아 나서야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피임약 사용이 일반화한 후엔 변화가 일었다. 1977년 대졸 여성의 결혼 연령 중앙값은 25세 이후로 서서히 높아졌다.

 

이때부터는 대학에 진학한 여성의 목표도 서서히 바뀌었다. 피임약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결혼과 출산을 미룰 수 있게 됐다. 자연스레 여성의 전문직 진출 기회도 많아졌다. 대졸 여성은 교사 등 여성에게 안정적인 직업 외에도 경영·법률·의료 등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피임약의 보급은 여성의 가정 밖 노동의 양과 질을 모두 늘렸다. 클라우디아 골딘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 “(피임약의 보급으로) 여성들이 출산을 계획해서 하게 됐다. 결혼을 늦출 수 있게 된 여성들은 대학에서 학업에 더 진지하게 임하게 됐고, 독립적인 미래를 계획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골딘 교수는 여성 노동시장이란 주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피임약의 등장은 여성 인력의 전문직 진출을 돕고, 여성 노동력 활용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가히 조용한 혁명이었다.

 

5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떠한 시사점을 얻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노동시장에서 잠시 배제된 경력단절 여성을 지원하는 데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이는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일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른바 ‘경단녀’를 줄이려면 민·관 할 것 없이 노동환경 개선에 나서야 한다. 우선 돌봄 공백을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안정적인 돌봄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재택근무, 시간제 근무, 노동시간 단축 등 유연한 근무 형태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비(非) 전통적인 근무 형태로도 얼마든지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음이 증명됐다. 해외에 좋은 사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자. 일본 이토추상사는 ‘아침형 유연 근무제’를 도입해 새벽 5시에 출근하면 오후 3시에 퇴근할 수 있다. 주 2회까지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남성 육아휴직의 활성화도 경단녀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다. 올해 상반기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32.3%까지 높아졌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여성 인력의 활용도 제고는 비단 성(性) 평등의 실현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의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경력단절 여성의 활용도가 낮다 보니 선진국에 견줘 우리나라의 여성 고용률은 암울한 수준이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세계 경제전망(6월)’을 보면 2021년 기준 OECD 평균 남녀 고용률은 14.7%다. 한국은 17.5%로 OECD 평균을 크게 밑돈다. 경력이 끊기다 보니 평균근속연수가 길어지기 어렵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졸 이상 여성의 평균근속연수는 5.9년에 그친다. 남성(8.5년)에 견줘 2.6년이나 짧다. 우리 경제는 저출산, 고령화, 지방 소멸 등 여러 위기 요인 포위돼 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자면서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가볍게 여겨선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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