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며 직장 동료, 각종 모임 회원, 친구사이 등이 모여 식사를 하고 술잔도 기울이는 송년회가 경기 침체 장기화에 덮친 탄핵정국으로 시름하는 자영업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고 있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민을 향해 “취소했던 송년회를 다시 열어달라”는 당부를 전하고 사흘이 흐른 17일 저녁, 세계비즈앤스포츠월드가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 3호선 양재역 인근,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인근 등 강남의 주요 번화가 및 회사 집결지 주변을 찾았다.
평일 중에서도 특히 손님이 없어 자영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로 꼽는다는 화요일, 게다가 이날 오후 8시 이후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 탓인지 길거리는 한산했다. 손님이 그리 많지 않은 매장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대기줄이 있을 만큼 손님이 몰린 가게도 분명 적지 않았다. 이날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약 4시간 동안의 풍경을 가감 없이 전한다.
저녁시간대 고깃집·횟집 문전성시
강남역 인근 강남대로의 양쪽 번화가 골목은 10년 전만 해도 평일에도 행인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리던 곳이다. 이날 저녁 7시쯤에는 ‘그래도 사람이 없지는 않네’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의 규모로 행인들이 삼삼오오 걷고 있었다.
30년째 떡볶이, 어묵, 닭꼬치, 순대를 팔고 있다는 행상인은 “코로나 이후로 확 사람이 줄었다”고 말했다. 초밥집 광고지를 행인들에게 나눠주는 어르신도 “나라꼴이 이렇게 되고 사람이 더 줄어든 것 같다”고 전했다.
거리에서 각 매장의 안을 들여다보면 손님 수의 편차가 심했다. 전체 테이블의 20%도 채우지 못한 곳이 있나하면 대기줄이 있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가게도 있었다. 후자는 대부분 고깃집과 횟집이었다.
맛집으로 유명한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고깃집은 1층과 2층 모두 손님으로 가득했고 대기 손님도 20명이 넘었다. 대기하는 인원들은 온열기구 근처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매장 종업원에게 이달 중 10명 이상 예약 가능한 평일이 언제인지 물어보자 “이미 예약한 단체손님들이 많아서 다음달 말까지는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걸고 영업 중인 한 횟집은 약 120명 손님이 내부를 꽉 채웠고 외부에서 기다리는 대기 손님도 10명이 넘었다. 이곳 종업원은 “최근 매출이 조금 줄긴 했지만 이 시간대는 항상 만석”이라고 밝혔다.
현대자동차 본사, LG전자 서초 연구개발(R&D) 캠퍼스 등 주요 회사들이 위치한 양재시민의숲역 인근에 자리 잡은 매장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저녁 6시쯤 돼지고기 부속고기로 유명한 고깃집은 50석 안팎의 자리가 꽉 찬 상태였고 세 팀이 매장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곳 근무자는 “평일에는 이 정도까지 손님이 몰리진 않는데 오늘은 40인 단체손님이 왔다”고 밝혔다. 잠시 담배를 태우러 매장 바깥에 나온 이에게 물어보니 그는 “인근 회사에서 송년회를 왔다”고 대답했다.
근처 횟집도 호황이었다. 4인 테이블 15개 중 13개가 손님으로 채워졌고 나머지 두 테이블도 예약팻말이 올려져있었다. 10인 단체손님이 있었는데 화훼업계 종사자들의 송년회 자리였다. 그 중 한명인 전은희(67) 씨는 “이 동네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인 친목회 ‘꽃들의 모임’이다. 회가 맛있어서 자주 오는 곳”이라며 “우리도 장사하는 사람들이라 돈을 써야지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경기가 안 좋아도 송년회는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12년째 영업 중이라는 점주는 “큰 회식 자리는 줄었지만 삼삼오오 모이는 손님들은 꾸준하다”며 “요즘은 특히 대방어철이라 손님이 몰리는 것 같다”고 전했다.
패밀리레스토랑, ‘가성비 술집’도 인기
저녁 8시쯤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과 7호선 논현역 사이 먹자골목의 풍경도 비슷했다. 고깃집, 횟집, 곱창·막창가게는 대부분 손님으로 가득했다. 횟집마다 대방어를 판매한다고 알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대방어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적힌 판넬이 곳곳에 붙어있는 가게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눈에 띈 곳이 유명 패밀리레스토랑이었다. 약 120석 규모로 보이는 내부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대기 손님도 한 팀이 있었다. 테이블을 여러 개 붙인 10인 단체와 8인 단체가 있었는데 의상, 나누는 대화 등으로 미루어 추정했을 때 두 단체 모두 직장 동료들의 모임으로 보였다.
종업원에게 평일 저녁 6시를 전후로 20인 단체 예약이 가능한 날이 언제인지 물어보자 “가장 빠른 일정이 26일”이라며 “연말이라 단체 예약이 많다. 테이블을 나눠서 앉는다고 하더라도 다음주는 예약이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무한리필 매장 등 ‘가성비’를 앞세운 가게로 몰린 인파도 인상적이었다. 닭요리와 주류를 2시간 동안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 매장은 저녁 7시쯤 총 16개 테이블 중 15개가 손님으로 차 있었다. 매장 직원은 “단체손님 20명도 있다”고 말했다. 중년과 20~30대가 섞인 무리로 술자리 게임도 하면서 흥겨운 모습이었다.
저녁 9시쯤 강남 번화가 고층건물의 3층 창문에 새겨진 ‘만원수산’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올라가보니 저녁식사 시간은 지났음에도 가게 내부가 가득 찼고 대기는 두 팀 7명이 있었다. 15분째 기다리고 있다는 30대 남자 셋은 “회도 술도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회는 퀄리티도 나쁘지 않아서 친구들과 자주 찾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후 8인 단체손님들이 매장에서 나오자 이들 셋이 순번대로 매장으로 입장했다.
개점 1주년을 맞이해 생맥주 3500원 행사를 진행한다는 현수막이 걸린 해장국 프랜차이즈 매장도 손님으로 붐비고 있었다. 마침 매장 밖으로 나온 중년의 두 회사원은 “요즘 세상에 3500원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나. 1차 후 갈만한 곳을 찾다가 현수막을 보고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생맥주 1900원, 닭날개·껍질튀김 900원’이라는 문구와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앞발을 들고 환영하는 알록달록한 일본식 이자카야 포장마차는 만석까지는 아니었지만 80% 이상 들어찼고 20대 젊은층의 비중이 높아보였다.
또 다른 곳으로 이동 중 군복을 입은 6명 청년과 마주쳤다. 외출을 나왔다는 이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취지를 설명하는데 ‘탄핵’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말을 끊은 그들은 “저희는 그런 거 말하면 안 돼요”라고 손사래 치며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10시 가까워지자 치킨가게·세계맥주 전문점 호황
저녁 9시가 넘어가자 기온은 영하 2도, 체감온도는 영하 4도를 찍었다. 이동식 포장마차에 삼삼오오 모여 어묵을 먹는 사람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떠올랐다. 강남역 내부에서는 중년의 남성 셋이 붉어진 얼굴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일찍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듯한 그들의 손에는 유명 도넛브랜드의 12개들이 상자가 든 봉투가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소·돼지고기 무한리필로 유명한 프랜차이즈 매장은 9시30분쯤 ‘금일영업 종료’라는 팻말이 붙었다. 여전히 내부에 20명 이상의 손님은 있었지만 2시간이라는 정해진 식사시간이 불가능해서 새로운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의미. 해당 점주는 “12월에는 저녁 6시 퇴근시간 이후로는 매일 단체손님이 있다. 23일은 50명 단체예약이 잡혔다”고 말했다.
밤 10시를 향해가자 세계맥주전문점 등 호프집으로 사람들이 몰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분당선 강남역 인근 골목의 규모가 큰 맥주 전문점은 두 곳 모두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곳 모두 10명 이상 단체손님의 비중이 높았다.
10시가 넘은 시각, 양재역 근처 치킨집도 1층은 모두 채웠고 2층 역시 반 이상 들어찼다. 점주는 “지금 단체가 세 팀 있다. 20명, 8명, 6명”이라며 “자영업자 입장에서 단체손님만큼 반가운 게 없다. 2년째 매장을 운영 중인데 근처에 회사가 많아서 그런지 12월에 확실히 단체손님이 많다”고 밝혔다.
2층에 모인 단체손님들 중 20인은 직장 회식, 나머지는 취미생활 동호회였다. 점주는 “주로 2차로 오는 곳이라 사전예약은 거의 없고 대부분 당일예약이다. 평일 중에는 목요일과 금요일에 120석을 모두 채우는 경우가 많고 화요일 수요일은 한산한 편인데 단체손님 덕분에 2층을 채운 것 같다”고 말했다.
10시30분 이후 말죽거리 먹자골목의 가게들은 만석인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체 테이블의 반 정도씩은 손님이 있었다. 이날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던 마트형 슈퍼마켓의 점주는 “지난주보다는 확실히 먹자골목에 사람이 늘긴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들 송년회는 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