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총투표수 300표 중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지난 14일 오후 5시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은 손에 든 응원봉을 높이 치켜들고 환호했다.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고 현장을 촬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국회의장이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음을 알리는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자 시민 간 연대의 상징이 된 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다. 집회 참가자들은 목놓아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희망차면서도 서정적인 노랫말이 듣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는 경찰 비공식 추산 최대 20만8000명이 모였다. 주최 측인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200만명으로 추산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상에는 마포대교를 걸어서 국회로 넘어갔다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1차 탄핵안이 상정된 지난 7일 집회 때보다 눈에 띄게 많은 시민이 몰린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당시 참가 인원은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이다. 한 시민은 “집회가 오후 2시로 앞당겨졌다는 얘기를 듣고 오후 1시50분쯤 여의나루역에 내려서 걸어갔는데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지도를 보지 않고도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시민은 “지난주에도 왔었는데 이번엔 가결 기대감이 높아진 만큼 참가자가 확실히 더 늘어난 것 같다”며 “스크린과 스피커 장비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집회 현장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무대에 오른 시민들의 자유 발언과 시민들이 준비해 온 스케치북 문구,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이 중계됐다. 외신도 주목한 K팝 시위는 이번에도 계속됐다. 시민들은 에스파의 ‘위플래시’,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 등 인기 K팝 곡에 맞춰 ‘윤석열 퇴진’ 구호를 외치며 표결을 기다렸다. K팝 합동 콘서트의 ‘떼창’과 다를 바 없었다.
참가자들 손에는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한 시민은 “NCT 팬은 아니지만, 친구에게 응원봉을 빌려 나왔다”며 “정육면체 모양이어서 각 면에 ‘탄’, ‘핵’이라는 글씨를 붙였다”며 웃었다.
아이돌 그룹의 응원봉을 지참한 시민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집회 현장을 배경으로 응원봉을 한데 모아 인증샷을 찍으며 친목을 도모했다. 아이돌 그룹뿐 아니라 프로 스포츠 응원도구, 요술봉, 광선검, 향초 등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된 모습이었다.
통신은 약간의 지연이 있었지만 확연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통신 3사는 여의도에 이동 기지국 29대, 간이 기지국 39대를 추가 설치해 트래픽 급증에 대비했다. 한 시민은 “카톡이 되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사진을 보내고 SNS에서 동영상을 시청할 때 막힘은 있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 전했다.
SNS 상에서는 통신이 먹통이 될 때를 대비해 구형 스마트폰의 DMB 기능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글이 공유된 바 있다. 실제로 DMB를 시청하는 시민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에 쓰던 갤럭시S10 모델인데, SNS에서 글을 보고 부랴부랴 찾아서 가져왔다”며 “뉴스 중계가 막히지 않고 잘 터져서 신기하다”고 말했다.
성숙한 시민 의식도 빛났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시민들은 스스로 공간을 확보해 통로를 만들고, 서로 밀치지 않으며 질서를 유지했다. 근처에 앉은 사람들끼리 핫팩과 간식을 서로 나눠주는 훈훈한 광경도 수차례 목격됐다. 큰 쓰레기봉투를 들고 종이 전단과 쓰레기를 줍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번 정국에서 화제를 모은 ‘선결제’ 문화도 엿볼 수 있었다. 국회 인근 카페와 식당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커피 수십 잔 또는 식사 수십인 분을 결제해두고 찾아와 먹을 수 있게 한 것인데, 시민 연대와 자영업자 상생이라는 취지를 모두 만족시켰다. 실제로 한 카페에 찾아가니 ‘집회 참여 선결제 남아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고, 많은 시민이 들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 떠났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표결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은 이날 하루 중 가장 고요했다. ‘가 204표’라는 언급이 나오자 환호가 터졌다. 이후 다시 만난 세계를 시작으로 K팝 메들리가 이어졌다. 5시30분쯤부터는 참가자들이 해산하기 시작하면서 집회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길거리에서도 흥겨운 K팝과 떼창이 이어졌다.
여의도 인근 식당과 술집도 대부분 만석이었다. 한 시민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다”며 “오늘은 오랜만에 신나게 달려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가결 가능성이 높게 거론된 만큼 윤 대통령 지지자들도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 결속을 다졌다.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대국본), 자유통일당, 전국안보시민단체총연합 등이 주최한 집회에는 경찰 추산 4만1000명이 모였다. 주최 측은 600만명을 주장했다.
이들은 동화면세점∼대한문 구간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모였다. 표결이 진행되기 전까지 ‘탄핵 반대’, ‘한동훈 척결’, ‘이재명 구속’ 등 구호를 외치며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다만 가결 발표가 난 직후 현장은 싸늘하게 굳어 여의도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참가자들은 ‘대통령을 돌려내라’, ‘이번 투표는 무효’라고 울분을 토했다. 연단에 선 전광훈 대국본 의장은 “이번 투표도 가짜다. 국민의힘을 해체하라. 우리는 반드시 대통령을 지켜낼 것”이라고 외쳤다. 신혜식 신의한수 대표는 “총선도 부정, 당대표 선거도 부정, 대통령 탄핵도 사기다.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화연 기자 h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