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구상한 사회보장제도를 수상(윈스턴 처칠)에게 보고하며 쓴 것으로 유명한 표현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인공지능(AI)의 급격한 발달 아래 한 인간의 생애 전체를 AI가 커버하는 시대가 다가오면서 해당 문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약 303조원이던 글로벌 AI 시장규모가 2030년 약 2700조원까지 팽창할 걸로 전망되는 만큼, ‘일상의 AI화’는 점차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쉬우면서 유용하지만, SF영화에서 볼 수 있는 주종관계의 역전이 떠올라 찜찜하기도 한 일상 속 AI를 조명한다.
◆임신 및 출산 성공률 높이는 AI… 얼굴도 미리 예측?
난임치료제 전문업체 아이젠파마코리아가 지난 10월 AI 기반 배아유전자 검사서비스 ‘PGTai2.0’을 출시했다. AI 데이터 분석 기술을 바탕으로 착상 전 배아의 유전적 이상을 사전에 판별해 임신 성공률을 높이는 서비스로 화제다. 미국과 영국서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만큼 국내에서도 영향력을 점차 키워갈 것으로 예상된다. 차병원도 같은 달 국제 심포지엄에서 AI를 접목한 체외 인공 수정의 임신율 증진에 관한 임상을 공유했다.
AI 기반 임신부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탄생도 기대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서비스업체 데이터쿡, 이대목동병원, 고등기술연구원이 지난 7월 업무협약을 맺고 구축에 돌입했다. 아울러 임신∙출산∙육아 플랫폼사인 럽맘이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서비스 ‘럽맘 AI’이 출시를 앞뒀다.
한편 중국에서는 임신 중 초음파 이미지를 통해 출산 이후 아기의 얼굴을 예측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림을 그려주는 생성형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최대 5살이 되었을 때 모습까지 예측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초음파 이미지는 출생 후 아기의 모습을 정확히 반영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AI 소아의료 상담으로 성장… 학창시절 AI 교과서로 공부
국내 최초 ‘초거대 의료 AI 서비스’도 올해 6월 첫발을 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발주한 사업에 카카오헬스케어를 비롯한 12개 기업에 10개 의료기관, 4개 대학이 팀을 꾸려 주간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들 컨소시엄은 2027년까지 AI를 활용한 실시간 상담, 질병 예측, 맞춤형 처방 등을 현실화해 오늘날 빈번한 ‘소아과 대란’을 막고 의료진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일부 서비스는 카카오톡 채널과 카카오헬스케어 앱(파스타)을 통해 이미 시범 운영 중이다.
‘AI 소아과 담당의’의 보살핌으로 영유아기를 보낸 아이는 AI교과서로 공부하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지난달 교육부는 2028년까지 초·중·고 전 학년에 AI교과서 도입을 목표로, 일단 내년 신학기부터 초등 3~4학년, 중학 1학년, 고교 1학년의 영어·수학 과목과 중·고교 전체의 정보 과목을 우선 도입한다고 밝혔다. 다만 추후 국회 결정에 따라 모든 학생이 필수로 활용하는 ‘교과서’에서 학교장 재량에 따라 활용 여부가 결정되는 ‘교육자료’로서 지위가 낮아질 수는 있다.
◆성인에게 AI란 직장·집안일 돕는 ‘비서’이자 ‘도우미’
사회생활, 특히 직장인으로서 삶을 사는 성인들에게 AI는 똘똘한 개인비서로서 업무를 돕는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 2022년 말 오픈AI사가 출시한 대화형 AI 챗봇 ‘챗GPT’는 지난달 국내 월간활성화사용자(MAU)가 258만명에 육박한다는 통계자료가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실제 국내외 운송 물류업체에서 근무하는 김성목 씨는 “업무에 필요한 해외 특정 국가의 임금인상률이나 경제성장률 같은 정보를 신속하게 알아볼 때 상당히 유용하다”고 밝혔다. IT 업계에 종사하는 김성연 씨도 “이전에는 다른 개발자들의 공식문서를 번역하면서 확인해야 했지만 지금은 챗GPT의 존재로 검색이 훨씬 편해졌다”고 말했다.
그밖에 다양한 업종의 직장인들이 디자인 레퍼런스 확보, 기획서 작성, 사유서, 규정 검색, 보도자료 초안 작성, 음성 자료의 텍스트화 등 작업에 챗GPT 같은 생성형 AI 챗봇의 도움을 받는다고 전했다.
사회생활을 한다고 집안일을 내팽겨 칠 수는 없는 상황에서 AI 기능이 탑재된 가전기기는 큰 도움이 된다.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 정수기, 공기청정기, 컴퓨터, 휴대전화 등이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알아서’ 집안일을 뚝딱뚝딱 해치운다. 워킹맘 배유미 씨는 “AI 가전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도 AI의 혜택을 받고 있다. 보호자가 집을 비웠을 때도 인공지능 급식기·정수기·장난감·헬스케어 기기를 통해 윤택한 ‘견생’ ‘묘생’을 이어간다. 동물병원에서 수의사의 진료를 돕는 AI 의료기기도 있다.
◆로봇 간호 받으며 황혼기… 고인 목소리도 AI가 되살린다
인공지능 로봇들이 주로 활약하는 곳 중 하나가 노인, 환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경기 하남시의 AI 건강로봇 ‘하남이’가 65세 이상 건강취약계층 독거 어르신의 일상을 함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경기 양평군, 전북 장수군 등 지자체에서도 인공지능 기술을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
AI 자율주행 순찰로봇 업체 종사자는 “로봇이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대응해 독거노인과 환자를 돕는 방식”이라며 “사람이 현재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올바른 약을 정시에 먹고 있는지를 확인해 정보를 관제 시스템에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장례식에서도 AI의 역할이 늘고 있다. 상조로 유명한 보람그룹은 최근 유명 작곡가 김형석과 손잡고 ‘AI 메모리얼송’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추억하고 싶은 순간을 입력하면 AI가 가사와 노래를 제작하는 것으로, 고인의 생전 영상이나 녹음본의 목소리도 활용할 수 있다.
이처럼 활용도가 점점 넓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AI 기술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없다. 챗GPT 같은 AI 챗봇 역시 100% 신뢰하기 어렵다. 실제로 AI 챗봇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말한 직장인 대부분이 “틀린 정보를 줄 때도 있기 때문에 팩트체크는 필수다. 현재로선 중요한 작업은 참고용으로만 활용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예 사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GPT만 활용 중이라는 직장인도 있었다. 이들은 지난 12일 챗GPT가 약 4시간 동안 먹통이 된 날에 대해서도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업무에 방해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 AI가 더욱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수록 이 같은 ‘AI 먹통’ 사태가 미칠 영향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또한 지금도 생성 AI를 악용한 ‘딥페이크’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인데 AI 기술이 발달할수록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가 찾아올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 주인공 인공지능 로봇이 겪는 혼란으로 대표되는 윤리성 문제, 다른 AI 로봇시대를 그린 영화나 소설 같은 작품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로봇과 인간의 주종관계 역전’에 따른 사회 혼란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걱정도 인간 입장에서 무시하기 어렵다.
박재림 기자 jami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