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기업 경영환경이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기술 패권 경쟁, 무역 장벽의 복원, 기후변화 리스크까지 기업이 마주하는 변수는 더는 단순한 외부 환경이 아니라 경영의 본질 그 자체가 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중국의 기술 굴기, 러시아·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의 도발은 단일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상호 연결된 복합 위협으로 진화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공급망 위기와 기술 통제, ESG 규제 등은 개별 이슈로 다뤄졌지만, 이제는 칩4 동맹(미국·한국·일본·대만), 백도어 통제, 사이버 안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디지털 제품 패스포트(DPP) 등 다층적 영역이 얽힌 복합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다. 단순히 리스크 요인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융합형 위기’를 읽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한 환경 속에서 기업은 어떤 전략적 대응이 가능할까? 힌트는 교차지점(intersection)이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란스 요한슨은 그의 저서 메디치 효과(The Medici Effect)에서 전혀 다른 분야가 만나는 지점에서 혁신이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14세기 피렌체에서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들이 한데 모여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것처럼, 지금 기업 역시 기술·시장·정책·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전략의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경영학의 상황이론(Contingency Theory)과도 맞닿아 있다. 상황이론은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단일 최적의 전략은 없다”는 전제하에,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직 구조, 의사결정, 리더십, 전략 방향이 유연하게 조정돼야 함을 강조한다. 교차지점 전략은 이러한 상황이론을 글로벌 리스크 시대에 실천적으로 확장한 개념이다. 각기 다른 리스크 축이 교차하는 지점을 선제적으로 포착하고, 그 지점에서 혁신을 설계하는 것이다.
실제 기업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전략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글로벌 ICT 기업은 기존의 기술 경쟁력만으로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공급망 내 탄소 배출과 에너지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통합 관리하는 ‘카본 운영 리스크 플랫폼’을 도입했다. 기술, 규제, ESG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브랜드 차별화와 리스크 최소화를 동시에 노린 전략이다. 또 다른 글로벌 소비재 기업은 정치적 불안정성이 높은 지역에서 오히려 현지 스타트업과의 공동 R&D를 추진해 새로운 시장 침투 전략을 구축했다. 위험을 회피하는 대신, 위험이 교차하는 곳에서 기회를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한 리스크 회피나 방어적 대응을 넘어서, 전략적 감각을 요구한다. 변화가 아닌 복합변화를 전제로 한다면, 기업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어떤 위협이 다가오는가?”가 아니라 “어떤 영역들이 지금 만나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전략의 좌표가 리스크 관리와 경영 혁신이 맞닿는 지점에 있을 때, 기업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
나아가 정부와 기업 간의 전략적 협력 방식도 교차지점 중심으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은 산업정책과 외교, 안보, 기술전략을 하나의 틀로 통합해 대응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단순한 규제 대응이나 자금 지원 요청을 넘어 산업-정책-기술-시장 간의 복합 교차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정부도 단편적 지원이 아니라 이러한 융합형 기획 능력을 갖춘 전략적 파트너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야다. 변화를 좇는 데 급급한 기업은 복합위기 앞에 취약하다. 반면, 변화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먼저 인식하고 그곳에서 미래형 실험을 설계하는 기업은 불확실성을 기회의 실험실로 전환할 수 있다. 전략이 다시 ‘예술’이 되는 시대다. 다가오는 르네상스를 이끄는 기업은, 바로 지금 교차지점에 서 있는 기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