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형상에,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튤립. 명실공히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꽃이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매년 4월이 되면, 암스테르담 근교 쾨켄호프 공원은 수백만 송이의 튤립 꽃밭으로 장관을 이룬다. 한때 이 순수한 꽃들마저도 투기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풍부한 자본으로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자 부자들은 부를 과시하고 싶었다. 마침 튤립이 그 과시욕을 충족시켜 주는 수단으로 떠올랐고, ‘튤립버블’이 시작됐다. 튤립이 인기를 끌자 사람들은 차익실현을 목적으로 꽃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격은 갈수록 폭등했다. 고급품종은 뿌리 하나가 8만7000유로(1억6000만원)까지 치솟았다. 정식 거래소가 아닌 주로 술집 등에서 거래되면서 튤립 매매는 전형적인 투기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과잉공급 등으로 황금보다 비쌌던 튤립가격은 95%이상 폭락했다. 이렇게 ‘튤립버블의 시대’는 허무하게 끝났다.
튤립버블은 ‘비트코인’ 탄생 초기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단위인 ‘비트(bit)’와 ‘동전(coin)’을 합친 말로, 지폐나 동전과 달리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가상화폐다. 2009년에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필명의 프로그래머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비트코인이 처음부터 투자자산으로 가치를 인정 받았던 것은 아니다. 실체가 없다는 이유로 폄훼의 대상이 되어 돌팔매질 당했다. 경제 전문가들 조차도 조롱과 비난을 쏟아냈다.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회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은 본질적 가치가 없다”며 “빛 좋은 개살구(fool's gold)”라고 조롱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도 “비트코인은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이 아니다”고 꼬집어 말한 적이 있다.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비트코인이, 2024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도널드 트럼프의 귀환과 맞물려 새로운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비트코인은 지난해 100% 넘는 상승률을 기록하며 중요한 투자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12월 4일(현지시간)에는 마침내 ‘10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비트코인의 가격 상승에는 트럼프의 대선 승리가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트코인의 대세를 따르기 위해 전 세계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도입한 국가는 엘살바도르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2022년 4월 경제 발전과 회복이라는 명문을 내세워 비트코인 법정화폐를 만드는 법안을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법화하려는 국가는 우크라이나, 쿠바, 파나마, 파라과이 등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가상화폐를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와 손잡고 비트코인 채굴 인프라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8월에는 비트코인을 비롯해 암호화폐를 자산으로 인정했다. 암호화폐 소득에 최대 15%의 개인소득세를 부과하고, 채굴 및 판매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법안도 승인했다.
일상 속으로도 스며들고 있다. 글로벌 프랜차이즈 업체 버거킹과 KFC, 서브웨이 등의 상점에서도 비트코인을 사용할 수 있다. 버거킹의 경우에는 독일과 베네수엘라 내 매장이 비트코인을 지불 수단으로 도입하고 있다. 캐나다 KFC의 경우 2018년 비트코인 버켓이라는 이름의 치킨세트 상품을 선보였다. 해당 세트 상품의 특이점은 오직 비트코인을 통해 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세계가 ‘비트코인 시대!’를 외치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어떤가. 2024년 한 해,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렸다. 미래를 향해 내딛기는커녕, 끝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에 육박했고, 국내 주식시장은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지난해 코스닥지수는 21.7%, 코스피지수는 9.6% 급락해 아시아 증시 가운데 꼴찌다. 특히나, 우려되는 것은 ‘혁신 경제’다. 선진국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비트코인이 황금이 될지, 튤립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경제 강대국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그들의 혜안과 통찰력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세상이 달라지면, 생각도 변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이대로는 안된다. 2025년 새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길 기대해본다.
김민지 기자 minj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