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술이 없어서 대기업에 공급을 못 하는 게 아닙니다. 납품할 기회가 없다는 게 문제죠. 대기업들이 테스트베드 운영을 통해 실력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국내 반도체 산업 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도 반도체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육성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코스닥 상장사를 운영하는 한 대표이사의 하소연이다. 이 대표는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때 국내 소부장 기업의 기술력이 증명됐지만, 대기업이 이를 채택하는 속도가 더디다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극도의 정밀함과 예민함이 요구되는 반도체 공정 특성상 종전에 사용하던 소재나 장비를 바꾸는 게 쉽지는 않다는 건 이들도 안다. 현 제조공정에서 검증된 협력사의 소재 및 부품을 바꿨다간 자칫 수율(정상 제품 비율)이 하락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기술력을 인증받은 품목을 테스트해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은 가혹하다.
소부장 기업들의 애로사항은 이뿐만이 아니다. 곧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 2기는 중국 반도체 산업을 더욱 옥죌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국내 소부장 기업에 대형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중국에서 생산 중이거나 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로선 현지 시장 점유율 하락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대(對) 중국 매출이 반 토막 날 거란 암울한 분석도 나온다. 중국이 대규모 재정을 쏟아부으며 빠르게 반도체 산업의 자립도를 높여나가는 점도 걱정거리다.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소부장 육성은 시급한 과제다. 국내 반도체 기업은 주요 소재∙부품∙장비를 해외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우리나라의 소부장 내재화율은 30%대에 그친다. 그만큼 ‘지정학적 리스크’, ‘관세 폭탄’ 등에 반도체 생태계가 휘둘리기 쉬운 구조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적극적인 소부장 육성 정책을 통해 소부장 핵심품목의 대일의존도가 완화된 점은 돌이켜볼 만한 사례다. 당시 2년 새 100대 핵심품목의 대일의존도는 30.9%에서 24.9%까지 낮아졌다. 이 기간에 불화수소의 대일 수입액은 66% 줄었다. 정부는 지난해 1분기 기준 대일 100대 핵심전략기술 및 품목을 32개로 늘리며 자립화 역량 확충을 지속하고 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도 있다. 지난해 11월 ‘첨단반도체 양산연계형 미니팹 기반구축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다. 이는 정부를 비롯해 SK하이닉스, 경기도 및 용인시가 투자해 약 1조원 규모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내에 ‘트리니티 팹’을 구축하는 사업이다. 이곳은 12인치 웨이퍼 기반의 최신 공정∙계측 장비 약 40대를 갖출 예정인데, 반도체 양산팹과 같은 환경에서 소부장 기업이 개발한 제품이 양산에 적합한지 검증하는 테스트베드로서 기능할 전망이다. 자체 클린룸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소부장 기업을 대상으로 공간 임대도 추진될 전망이다. 소부장 기업으로선 제품 실증과 양산 테스트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미니팹 구축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국내 반도체 소부장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이들 제품을 사용하는 수요기업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우수한 젊은 반도체 실무인력을 채용하는 소부장 기업에 대해 정부 지원 수준도 높여야 한다.
글로벌 분절화 흐름 속 국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칫 반도체 강국으로의 재도약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대기업을 돕기 위한 정책만이 산업 육성을 위한 능사가 아니란 걸 정책 당국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오현승 기자 hs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