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주식시장은 미국 증시의 재채기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입니다.”
최근 만난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 증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증시의 약한 기초체력이 최근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 체력이 약해진 탓에 조그마한 외부 악재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지적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다보니, “미국이 재채기만 해도 한국경제는 감기에 걸리고, 중국경제가 감기에 걸리면 한국경제는 몸져 눕는다”라는 속설이 있지 않은가.
지난 8월 5일. 그날은 말 그대로 ‘블랙 먼데이’(검은 월요일)였다. 커플링(동조화) 움직임을 보인 뉴욕 증시가 1%대로 하락하자 국내 증시는 파랗게 질렸다. 코스피 지수는 미국 경기침체 우려로 하루 만에 8.77% 내렸고, 지수가 234.64포인트나 빠졌다.
코스피가 하루 만에 200포인트이상 빠진 것은 국내 증시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코스닥도 11% 넘게 하락했다. 대장주도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코스피·코스닥 양대 시장에서는 하루 만에 시가총액 235조원이 증발했다.
지난 추석 연휴에 나온 외국계 증권사의 ‘매도 보고서’도 국내 증시를 한껏 괴롭혔다. 모건스탠리 보고서 한 건의 위력은 대단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달 15일 공개된 ‘겨울이 곧 온다’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의 투자 의견과 목표주가를 크게 깎아내렸다. 목표가를 종전 26만원에서 12만원으로 54%나 낮췄다. 투자 의견도 ‘비율 확대’에서 ‘비율 축소’로 한 번에 두 단계 내렸다.
목표가 하향 조정의 이유로 ‘메모리 반도체 시황 악화’를 꼽았다. 모건스탠리는 “실적 개선세가 올해 4분기에 정점을 찍고, 내년부터는 D램과 낸드 평균 판매 가격(ASP)이 하락할 것”이라며 실적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추석 연휴 이후 첫 거래일이었던 지난달 19일 SK하이닉스 주가는 6.14%나 곤두박질쳤다.
SK하이닉스 주가는 장중 11% 이상 폭락했다가 그나마 낙폭을 줄이며 장을 마쳤다. 문제는 외국계 보고서 하나에 국내 증시가 흔들린 게 한두 번이 아니란 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증시의 기초체력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증시에서의 거래대금도 쪼그라들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19일 기준 코스피·코스닥 시장을 합산한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16조9927억원으로 집계됐다. 올 들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증시 열기의 측정하는 지표로 꼽히는 투자자예탁금과 증시 거래대금도 동반 감소하고 있다.
투자자예탁금은 투자자가 주식을 판 뒤 찾지 않거나 주식을 사기 위해 증권사 등에 맡겨놓은 자금을 말한다. 지난달 19일 기준 투자자예탁금 규모는 51조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하반기가 시작된 지난 7월 1일 투자자예탁금 규모가 58조원을 웃돌았던 것을 비교하면 3분기 들어 약 7조원 이상 감소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국내 증시의 기초체력과 식어버린 투자 열기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근본적으로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해외 주요국의 경기 상황에 덜 민감한 건강한 체질을 갖춰야 한다. 장기 투자자에 대한 세제 혜택 등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개인 투자자들은 그간 국내 증시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활발히 주식을 매수할 수 있도록 정책 불확실성을 줄이고, 방파제 역할을 해줄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기업배당 확대는 물론 국내 증시를 위축시키는 불필요한 규제도 완화돼야 한다. 정부의 리스크 대응책 역시 절실하다. 정부가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증시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미국의 전설적인 투자자 존 템플턴은 “강세장은 비관론 속에서 태어나, 회의론 속에서 성장하며 낙관론 속에서 성숙하고, 행복감 속에서 죽는다”고 했다. 현재 투자심리는 낙관론으로 가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코스피가 올 하반기에 ‘꿈의 지수’ 3000선을 돌파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다. 얼어붙은 국내 주식시장에 따뜻한 훈풍이 불길 기대해본다.
김민지 기자 minji@segye.com